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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디펜스 뉴스

중국의 입장에서 분석한 일본의 국방력(Ⅰ)

작성일
2011-02-07
조회
4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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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기술품질원 기술기획본부 기술정보센터
해군대령 박원기·위촉연구원 김정자

본 기사는 중국의 군사 전문지 兵器知識(2010.5월호)에 실린 내용을 편집한 것으로 중국인이 바라보는 일본의 능력을 기술한 것이다. 일부 내용은 중국인이 아닌 독자가 읽을 경우 다소 오해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으나, 일본에 대한 중국의 이해와 견해를 살필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가능한 원문에 충실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본 기사의 내용은 국방기술품질원이나 편집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님을 밝혀둔다.
전체 내용은 2회에 걸쳐 게재될 예정으로, 이번 호에서는 일본이 느끼고 있는 위협과 일본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일본인의 정신(무사도), 일본의 전시대비 능력 그리고 일본의 슈퍼컴퓨터 분야에 대한 내용을 수록할 예정이다. 다음 호에서는 일본의 국방능력 중 항공, 잠수함과 미사일 분야에 대한 분석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일본의 4가지 위협과 일본인
일본인은 '잇쇼켄메이(一生懸命)', 즉 목숨을 건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그처럼 일본 국민은 위협 속에 살고, 우환 때문에 죽는다. 일본은 현재 몇 가지 위협에 직면해 있다.
장기적으로, 일본의 존재와 발전에 위협이 되는 첫 번째는 국토침몰이다. 즉, 해수면 상승이나 지각운동으로 인한 해저지판의 하강으로 국토가 침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비록 현재는 일부 조짐만 보일 뿐이고, 해저지판의 하강은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일본으로서는 외면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두 번째 위협은 화산과 해일이다. 이는 첫 번째 위협처럼 일본을 송두리째 없애버리지는 않겠지만 수많은 인명을  빼앗고 사회 기반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일본인은 후지산(富士山)의 기개에 매력을 느끼지만, 용암을 분출하게 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해일은 일본 열도의 지형을 바꿔놓을 수는 없겠지만, 단 한 번의 충격만으로도 전국을 강타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재나 지진 속에서는 살아나갈 방도가 있지만, 거대한 파도 앞에서는 미미한 존재인 인간이 도망칠 길은 없다. 지진은 해일을 동반하다는 점에서 일본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위협은 지진과 태풍이다. 지진은 화산이나 해일처럼 무수한 일본 국민의 목숨을 앗아가지는 않지만, 그로 인한 피해와 손실은 전쟁을 치른 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대도시의 즐비한 고층빌딩과 시멘트로 지어진 교량은 지진이 휩쓸고 가면 엄청난 인명피해 뿐 아니라 전 도시 기능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중국의 광활한 대륙은 태풍도 작은 바람으로 바꿔놓을 수 있지만 국토가 좁은 일본은 한 번의 태풍으로도 모든 것이 사라질 수 있다.
이상 세 가지가 일본에 대한 자연적인 위협이라고 한다면 다른 한 가지는 인간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위협이다. 유교 전통사상의 영향에 의해 중국은 1930년대의 독일과 일본이 가졌던 야심 따위는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일본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물론 중국의 민족주의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기도 하다. 아시아 태평양의 수많은 국가는 아직도 일본이 저지른 과거의 아픔을 잊지 못하고 있다.
또한 작금의 일본과 미국의 관계를 고려할 때 미국이 일본에 대한 위협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사실상 일본에 대한 위협은 러시아가 유일하다. 따라서  러시아의 핵 능력은 일본의 핵무장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이 일본에 가져다주는 피해는 지진으로 인한 피해보다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 위협은 가장 먼저 지구물리, 해양물리, 기상, 재난구조 그리고 수송능력 등의 분야에서 일본에 치명적인  손해를 입힐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군수산업 발전이나 주요자원의 독점에 대한 관심을 이러한 분야로 돌려야 할 것이다.
※ 편집자 註
필자는 의도적으로 센카쿠 열도와 자원 확보 문제 등에서 일본과 대립하고 있는 중국을 일본의 위협에서 배제하고, 핵무장과 군사력 그리고 자원 확보에 대한 일본의 관심을 문제로 삼고 있다.

일본인과 무사도
원나라 1대 황제 쿠빌라이 칸(Kublai Khan)은 2차례(1273년, 1281년)나 일본을 정벌하려 했으나, 일본 사무라이 집단의 치열한 저항과 강력한 태풍으로 인해 실패했다. 당시 일본은 상륙한 원정군에게서 화약, 활과 독화살, 몽고 야생마, 대형부대 지휘술, 소형부대 작전술, 군대 훈련방식 등을 받아들였다. 당시 유라시아를 종횡하며 이름을 떨치던 '천하무적' 쿠빌라이 군에 거둔 대승은 일본 통치자와 사무라이 계급에 큰 자부심을 갖게 하였다. 이후, 지방 사무라이의 세력이 커지면서 일본은 남북으로 분열되고, 1392년 정권을 잡은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는 일본을 통일하고 무로마치(室町) 시대를 열어 사무라이 정신은 시대 사조로 자리 잡게 되었다.
명나라 때, 중국 동남쪽 연해 지역에 출몰하던 일본 해적과 1592년부터 1598년 간 조선에서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일본은 중국으로 하여금 일본을 다시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 200년 동안 깊이 잠들어 있었지만,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시작과 함께 중국은 다시 좌불안석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중국은 청일전쟁에서,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일본군대의 흉포함을 맛보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중국, 한국,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얀마, 싱가포르, 태국, 인도는 모두 일본군에 유린당했다. 일본군은 가볍게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제국을 공격했고, 태평양 전쟁 초반 미군에 잇달아 승리를 거두었으며 심지어 Coral Sea를 사이에 두고 호주를 압박하고 오세아니아 다윈 항구를 폭격했다. 작은 섬나라 일본이 당시 선진 강국에 거둔 승리는 일본 민족이 가진 강한 내적 잠재력을 보여준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 후 일본은 서양의 헌법과 민선 정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28년간의 짧은 기간 동안 분발하여 1973년 세계 2대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한 이후 오늘날까지 그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민족의 내면은 과연 어떤 것인지가 궁금하다.
일본의 주요 이데올로기는 사무라이 정신(혹은 '무사도'), 유가, 불교, 신도교(神道教)의 영향을 받았다.
9세기 중반부터 영주는 가문의 젊은 남자로 구성된 개인 무장 집단인 사무라이를 만들었다. 이들은 대내적으로 영주 가문을 보호하고, 대외적으로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을 벌였다. 중국의 사대부와 같이 사무라이 집단은 일본 사회의 기본 구성원이 되었고, 그 후로 오랫동안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 사무라이는 유명한 가문과 흥망성쇠를 같이 했으며, 일본 역사에서도 혼란, 권력이양, 영토변경에 큰 영향을 미쳤다.
1180년 일본의 막부제가 막을 내리고 천황제가 시작된 이래 사무라이 권력은 커지고 일본은 분열 위기에 처했다. 오오닌의 난(應仁之亂, 1459년)에서 에도(江戶) 시대 초기(1603년)까지 150년간을 센코쿠(戰國) 시대라 부른다. 이 시기는 사무라이 전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 이르러서야 평정을 되찾았다. 이후, 무사도는 정식으로 일본 문화에 스며들었으며, 일본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갔다.
당나라 이래, 중국의 유교 문화와 궁정예식, 법규, 과거제도 등이 일본에 전해졌는데, 일본은 유교문화 중심의 논리체계를 '충(忠)'이라는 글자로 발전시켰다. 즉, 사무라이의 영주에 대한 충성, 시민의 직업에 대한 충성, 하급 계층의 상급 계층에 대한 충성, 아내의 남편과 가정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다.
무사도의 충성 개념은 모든 계급과 모든 국민에게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충성을 바쳤다. 충성은 일본인에게 매우 중요한 심리요소로 자리 잡았고, 전쟁과 현대화 과정을 거치며 일본을 재건하는 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일본군은 정치인과 신직(神職, 일본 신사에서 일하는 자)을 전투 행렬에 넣지 않았지만 일본군의 전투력과 사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목숨이 다 할 때까지 전투에 임하도록 했다.
일본 사무라이는 날카로운 검을 무기로 사용했고, 동아시아 최고의 검 제련 및 단조기술을 보유한 데에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검을 차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무라이들은 엄청난 사회 불안을 야기했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 사무라이 집단은 냉정과 인내를 강조하게 되었다. 일본 의식세계에서 냉정한 사고는 궁극의 경지까지 발달했다. 전쟁 중, 일본의 각급 지휘관들은 포화와 굶주림, 비바람 등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극도의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무라이 문화는 일본의 군대뿐 아니라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미쓰이(三井)工業帝國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일본 최대의 재벌기업이었다. 그들은 방대한 조직력으로 수많은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이들의 관계는 산업화 이전의 영주와 사무라이의 주종관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쓰이 가문은 복잡한 법률 및 개인 네트워크를 통해 기업을 조직, 관리했다. 한번 형성된 조직은 상호 주식 보유 방식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쓰이 그룹은 강제 해산되었지만, 미쓰비시(三菱), 마쓰시타(松下), 소니(索尼), 도요타(豊田) 등의 새로운 재벌로 전환되어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즉, 새로운 일본은 옷을 갈아입은 예전의 일본에 불과했다. 무사도 정신이 일본의 기업과 경제는 물론이고 정부, 정당, 군벌, 전투 지휘, 언론매체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전후 일본 재건 시기에, 일본의 기업 인들은 세계시장 확보라는 목표를 위해 높은 충성심을 보였다. 일본인은 단체행동을 좋아하고 무력한 개인이라도 단체에 속하면 의지가 강해지고 기개가 올라간다. 일본 심리학자 도이 다케오(土居健郎)는 일본인이 '아마에(甘え·응석)'라는 의존심리가 매우 강하며, 일본인의 국민성을 이루는 기본요소라고 주장했다. 일본 대기업 사원들은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고, 결함이 없는 최고 품질의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전 사원이 합심한다. 개인은 자신의 몸을 기업과 사회를 위해 바친다. 그들은 사무라이 정신으로 자신의 기업을 세계 최고로 만들기 위해 또는 최고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온 힘을 쏟기에 부실기업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분투하는 그들의 결연한 의지는 타민족에 대한 학대나, 최고의 기술을 정복하고 사업 목표를 달성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오늘날의 세계는 예전의 세계와 매우 다르다. 국가와 국가, 기업과 기업, 사람과 사람 간의 경쟁은 상품과 상품의 경쟁에서뿐 아니라, 서비스, 독창성, 영상예술, 문화상품, 음악, 스포츠, 여행, 친화력, 공헌도, 개방적인 태도, 거시적인 정책, 제도 및 개혁, 교육, 개인적인 창의력, 언어 능력, 인터넷과 휴대전화, 트위터, 네트워크 능력, 인터넷 중독의 관리감독 능력 등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전시대비 능력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자 일본은 공식적으로 군수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전차, 전투기, 함정, 미사일 등의 군수 관련 산업은 모두 민간 기업으로 이전되었다. 일본의 한 연구기관은 일본이 국제 군수품 시장에 뛰어든다면 군용 전자설비 40%, 군용차 46%, 항공우주 25~35%, 함정 60%를 장악하리라 예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일부 자동차 회사에 군용 항공기 생산을 위임했다. 오늘날 일본의 자동차 생산량은 1,000만 대 이상이다. 일반적으로 자동차 350대를 생산할 비용과 물자로 군용 항공기 1대를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일본이 30%의 자동차 생산능력을 항공기로 전환 시 연간 만 대 이상의 항공기를 제작할 수 있다.
일본은 기계제조산업의 높은 호환성으로 자동차 45대의 생산력을 전차 1대로 전환할 수 있다고 볼 때, 일본 자동차 기업이 15%의 생산력을 투자한다면 연간 3만 대 이상의 전차를 제작할 수 있다. 일본에는 미쓰비시 중공업(三菱重工), 닛폰 제강(日本製鋼), 고마쓰 제작소(小松製作所)의 3대 기업이 전차 생산을 책임지고 있으며, 그중 미쓰비시 중공업만 해도 연간 2,000대의 전차를 생산할 수 있다.
일본에서 미사일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 중 전자기계 제품과 세탁기 생산 공장의 비율은 매우 높다. 따라서 전쟁이 발발하면 이들 기업은 빠르게 미사일을 생산해 낼 수 있다.
미국의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사용된 반도체 부품 중 일본산의 비중은 자국산보다 높으며, 그중에는 일본만 공급할 수 있는 부품도 있다. 일본 자위대가 사용하는 미사일은 90%가 자국산으로 모두 세계적으로 우수한 성능을 자랑한다. 일본에서 생산된 견착식 惠子 지대공미사일 성능은 미국산 Stinger보다 훨씬 뛰어나다.
일본은 법률적으로 군용 항공우주산업을 금지하고 있지만, 운반 로켓 등의 민간 우주산업은 언제라도 군용으로 전환될 수 있다. 각종 고체연료 로켓은 일부만 개조해도 중거리 미사일로 바뀌며, TR-1A 로켓은 내부를 700kg의 탄두로 교체해 사정거리 750km로 한반도 전역을 겨냥할 수 있는 중거리 미사일로 전환할 수 있고, M-3S2 로켓도 위성장치를 탄두로 교체해 동남아 지역을 사거리로 하는 중거리 미사일로 전환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일본은 아시아 최대의 조기경보기 편대를 보유하고 있다. 1998년 이전 일본은 이미 E-2C 13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중 5대는 2003년 이전에 성능개량을 마쳤다. E-767 조기경보기 4대는 1996년부터 운용되기 시작했다. 다국적 연합 공군훈련 '合作對抗 2003'에서 일본의 E-767 조기경보기 1대와 F-15J 전투기 6대는 공중급유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 미국 알래스카까지 비행하며, 그들의 우수한 능력을  드러냈다.
미국의 Rand 연구소는 일본의 핵 능력이 중국보다 뒤처진다고 보지 않는다. 2005년 일본은 핵 발전기 54대를 보유했으며 2008년에는 70대를 넘어섰는데 그중 11대가 3세대 발전기이다. 현재 일본은 원자력발전소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플루토늄-238 1만 톤을 보관하고 있다. 흑연감속 원자로와 중수로에서 3~6개월 동안 플루토늄-238의 냉각, 재처리, 제련, 가공과정을 거치면 플루토늄-239를 얻을 수 있다. 2010년 일본은 80~90톤의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원자탄 12,000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양이다.
일본은 연간 1만 문의 화포를 생산할 수 있으며, 현재 일본군이 보유하고 있는 화포는 5천 문 이상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일본에서 화포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철강의 양은 전체의 3%였다. 2006년 일본의 철강 생산량을 1억 1,600만 톤이라고 할 때 그중 3%인 348만 톤으로 화포를 만든다면, 한 문의 화포에 각 10톤의 철강이 사용되므로 연간 35만 문 가량의  화포를 제작할 수 있다.
또한 일본이 현재 선박 건조 능력의 20%를 군함 건조에 사용한다고 볼 때, 5톤의 상선으로 1톤의 군함을 건조할 수 있다면 연간 70만 톤의 군함을 건조할 수 있다. 이는 기존에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함정의 2배에 달하며, 동북아 지역에서 최대 규모가 될 것이다. 대형 상륙함은 48시간 내에 경량급 항공모함으로 전환될 수 있다.
미사일 방어체계 측면을 살펴보면, 일본은 SM-3와 PAC-3 방어체계를 형성했다. 현재 조기경보는 고정 레이더기지 28곳과 기동 레이더기지 12곳, 이지스함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고정 레이더기지 28곳은 FPS-3 위상 배열 레이더를 장착하고 원/근거리 표적 탐지 능력을 갖춰 레이더반사면적(RCS: Radar Cross Section)이 작은 비행표적을 탐지할 수 있고, 기만 및 유인체계를 탑재하여 재밍 기능을 발휘한다.

일본은 2008년부터 아오모리현(靑森縣)의 오오미나토(大湊), 가고시마현(鹿兒島縣)의 시모 코시키지마 열도(下甑島), 오키나와현(沖縄県)의 요자다케(與座岳) 등 지역에 매년 탄도미사일 추적능력을 갖춘 신형 경계관제 레이더 FPS-XX를 배치하기 시작했고, 기존의 조기경보 레이더망을 개조하고 있다. 이는 일본의 미사일 방어체계가 실질적인 운용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일본이 앞으로 서남지역에 배치할 FPS-XX 레이더 2대는 중국의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겨냥한 것이다. 미군은 자국의 조기경보 위성으로 동아시아에서 발사된 미사일을 발견, 확인할 수 있긴 하지만, 극동지역에 고정 레이더 장비가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한 미사일 비행궤도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하지만 FPS-XX 레이더는 그런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에 레이더로 수집한 모든 정보를 공유하자는 요구를 했다. 공중 정찰 조기경보기 시스템을 빠르게 발전시켜온 일본은 2003년 정찰 위성 2기를 발사하고, 2008년에 3기를 추가 발사했다.

슈퍼컴퓨터 능력
    1976년 미국 Cray사가 초당 2억 5천만 회의 연산이 가능한 슈퍼컴퓨터를 최초로 출시한 이후 일기예보, 생명과학의 유전자 분석, 원자력 산업과 우주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는 슈퍼컴퓨터는 국가의 종합능력을 대표하게 되었 다. 일본은 오랫동안 슈퍼컴퓨터의 연구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1982년 히타치(日立) 기업은 초당 6억 3천만 회의 연산이 가능한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고 원주율 계산의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다. 1980년대 중반 히타치, NEC, 후지쓰(富士通) 기업은 세계 20%의 슈퍼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2002년 NEC 기업이 개발한 Earth Simulator 컴퓨터는 1초에 36조 회의 연산속도로 2년 반 동안 세계 1위 자리를 유지했다. 그리고 2004년 10월 20일 세계에서 연산속도가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 SX-8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초당 58조 회의 연산이 가능한 SX-8 컴퓨터는 Earth Simulator보다 1.8배나 빨랐다. 계산기 512대가 연결된 SX-8은 NEC사가 개발한 과학기술 계산 전용의 중앙처리기를 탑재했다.
최근 일본 경제가 악화되자 연구개발 자금이 많이 삭감되었고, 히타치, NEC, 후지쓰 기업이 보유한 슈퍼컴퓨터의 비중도 1.4%로 떨어졌다. 1980년대 일본의 반도체(슈퍼컴퓨터의 중요부품) 점유율은 세계 절반을 차지했으나 2005년에는 미국에 밀려 25%까지 떨어졌다. 민주당 집권 후 심각한 경제침체와 재정악화에 시달리게 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는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2010년 재정예산 편성 시, 각 정부부처의 예산 항목을 엄격히 심사하고 불필요한 항목의 예산을 과감히 삭감, 동결했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나날이 악화되는 슈퍼컴퓨터 개발 상황을 개선하고자 2006년부터 차세대 슈퍼컴퓨터 연구사업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화학연구소(理化学研究所)의 주도로 이루어진 사업은 2012년까지 초당 1경(1억×1억) 회의 연산속도를 가진 슈퍼컴퓨터 개발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개발비 1,230억 엔을 투자할 계획으로 고베시에 제어실을 설립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일본 관련 기업의 과학연구팀은 서로 협력했으며, 히타치, NEC, 후지쓰는 330억~400억 엔을 투자했다.
하지만 이런 결정적인 시기에 하토야마 정부가 갑자기 예산을 삭감하는 바람에 270억 엔의 연구자금이 동결되었다. 이는 실질적으로 슈퍼컴퓨터 사업이 정체되었음을 의미한다.
2005년 10억 달러가 채 되지 않았던 미국의 슈퍼컴퓨터 연구비용은 2009년 16억 달러를 훌쩍 뛰어넘었다. 하지만 일본의 2010년 예산안을 살펴보면 슈퍼컴퓨터 연구비용은 미국의 1/5에도 미치지 못하며 예산 동결 대상에 포함되어 해가 거듭될수록 퇴보하고 있다.
하지만 '말라 죽은 낙타가 말보다 크다'는 말처럼 일본은 컴퓨터 개발의 악조건 속에서도 여전히 우수한 성과를 거둬들이고 있다. 일본의 국립재료과학연구소는 17개의 Duroquinone 분자로 이루어진 세계 최소형 컴퓨터를 개발했다. 영하 196℃의 진공상태에서 듀로퀴논 분자 1개를 가운데 놓아두면 나머지 16개의 듀로퀴논이 그를 둘러싸고 원 모양으로 배열되어 실온에서 작업할 수 있게 된다. '분자 트랜지스터'는 반도체 트랜지스터와 달리 각각 다른 방향을 가진 4개의 원추형 탄소로 구성되어 4개의 논리 구조를 가지며, 일반 컴퓨터보다 16배나 빠른 연산 속도를 보인다. 2차원의 16개 분자 고리 구조로 구성된 분자가 3차원의 1,024개 분자 고리 구조로 확장된다면, 동시에 1,024개의 명령을 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일반 컴퓨터보다 1,024배나 빨라질 것이다.
그 밖에도 일본은 2009년 7월 세계 최초로 인공 DNA 분자를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DNA 구조는 독특한 화학적 특성과 우수한 안정성으로 정보 저장 및 확장을 가능케 하여 DNA 컴퓨터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할 것이다.

참고자료
兵器知識, 2010.5월호